- [종합] 이세돌 은퇴시킨 ‘알파고’ 쇼크 9년…바둑계 흡수한 AI 명암은
본문
사회적 반상 ‘시스템 오류’ 낸 알파고 역풍(하)
-비(悲), 남용의 ‘삭풍’
-잇따른 부정행위(치팅) 논란…윤리 문제 부각
-바둑학원 ‘된서리’…오프라인 일자리 위축
-AI에만 ‘올인’, 인간 고유 창의력 저하 우려
-‘두뇌 스포츠’로서의 존재감 희석

“프로 기사 자격 박탈과 함께 향후 중국위기(圍棋)협회와 회원 단체에서 개최하는 대회에 8년 동안 출전할 수 없다.”
확실한 본보기를 보여주겠다는 의지였다. 향후 유사 행위의 사전 차단을 위해선 고강도 제재가 필요하다는 뜻이 담겼다. 중국 바둑의 컨트롤타워인 중국위기협회가 지난달 26일 “친쓰웨(19) 2단이 지난해 12월 전국바둑선수권대회에서 휴대폰을 소지하고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을 사용한 게 적발됐다”며 꺼내든 최고 수위의 중징계였다. 협회 측은 “AI 발전으로 공정과 공평이 생명선인 바둑도 새로운 시대에 직면했다”며 “앞으로도 이와 관련된 부정행위를 엄격히 조사하고 적발 시엔 강하게 처벌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중국위기(圍棋)협회는 지난달 26일 "친쓰웨(19) 2단이 지난해 12월 전국바둑선수권대회에서 휴대폰을 소지하고 인공지능(AI) 프로그램을 사용한 게 적발됐다"며 프로 기사 자격 박탈과 함께 향후 8년 동안 협회와 회원 단체에서 개최하는 대회 출전 금지까지 포함된 최고 수위의 중징계 조치를 내렸다. 한국기원 제공
협회에 따르면 친쓰웨 2단은 이른 새벽 당일 휴대폰을 숨긴 상태에서 경기장에 입장, 대국 도중 해당 폰으로 AI 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 부정행위까지 저질렀다. 실제 대회 당일 친쓰웨 2단 기보는 AI 프로그램 추천수와 70% 이상 유사했다. 바둑대회엔 대국 도중 휴대폰을 비롯해 모든 전자기기 지참이 금지된다. 중국 바둑계 소식에 정통한 한 중견 프로 바둑 기사는 “매월 발표됐던 중국 내 랭킹 발표가 지난 1월에 생략됐던 주된 이유도 친쓰웨 2단 사건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귀띔했다.
中-韓 바둑계, AI 악용한 부정행위로 몸살…자격정지 포함한 중징계 처분 잇따라

중국의 양딩신(27) 9단이 지난 2022년 12월 ‘제14회 춘란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전’(우승상금 1억8,000만 원)에서 대국을 벌이고 있다. 양딩신 9단은 이 대회 8강전에서 자신에게 승리한 데 이어 4강전에서도 세계 랭킹 1위인 신진서(25) 9단을 이긴 리쉬안하오(30) 9단에 대해 인공지능(AI)을 활용한 부정행위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양딩신 9단은 "확실한 물증도 없이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중국위기(圍棋)협회로부터 ‘6개월 출전 금지’ 징계를 받았다. 한국기원 제공
반상(盤上)에 불어닥친 ‘AI 쇼크’엔 만만치 않은 부작용 또한 포함됐다. 무엇보다 오남용에 따른 후폭풍이 거셌다. 대표적인 사례는 역시 AI를 악용한 부정행위다. 중국에선 친쓰웨 2단 사고 이전부터 AI ‘치팅(cheating)’을 둘러싼 논란으로 떠들썩했다. 치팅이란 보드게임인 바둑이나 장기, 체스 등에서 상대방도 모르게 AI의 도움을 받는 부적절한 행위를 말한다. 3년 전에도 초일류 기사인 중국의 양딩신(27) 9단이 동료인 리쉬안하오(30) 9단에 대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에서 치팅 의혹 제기를 했다. 양딩신 9단은 리쉬안하오 9단에게 “프로 기사직 은퇴를 걸고 모든 신호가 차단된 대국장에서 화장실 출입 없이 하루에 1대국씩 20대국을 벌이자”며 진검 승부를 신청하면서 논란을 확산시켰다.
지난 2022년 12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에 온라인 대국으로 열렸던 세계 메이저 기전인 ‘제14회 춘란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전’(우승상금 1억8,000만 원) 8강전에서 양딩신 9단에게 승리한 리쉬안하오 9단이 4강전에선 세계 최강인 한국의 신진서(25) 9단을 상대로 80% 중반대의 AI 수순 일치율로 이어간 연승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의혹 제기로 파장은 커졌고, 중국 협회 측은 “확실한 물증도 없이 의혹을 제기했다”며 양딩신 9단에게 그해 12월 26일 자로 ‘6개월 출전 금지’ 징계를 내렸다.

인공지능(AI) 등장 이후, AI를 악용한 부정행위가 이어지면서 바둑계 내부에서도 이와 관련된 재발 방지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바둑TV 캡처
치팅 사태는 국내에서도 불거졌다. 지난 2020년 1월 한국기원에서 열린 ‘제145회 입단대회’ 본선에서 AI를 이용한 부정행위로 A선수가 실격 처리와 함께 처벌됐고 역시 그해 9월 인터넷으로 열렸던 온라인 대국에서 B선수가 치팅으로 적발, 1년간 공식 기전 출전 금지 처분을 받았다.
AI는 오프라인에서 또한 역풍을 몰고왔다. 바둑도장에 불똥이 튀면서 예기치 못한 일자리 문제까지 양산시키면서다. 지금까지 프로 바둑 기사들은 현역에서 은퇴한 후, 주로 바둑도장에서 후진 양성 등으로 생계를 이어갔지만 AI 등장으로 직격탄을 맞았다. 바둑도장보단 이미 인간계 이상의 수준인 AI를 ‘가정교사’로 채용, 1대 1 연구 기류가 일반화된 탓이다. 국내 최대 프로 기전인 ‘KB국민은행 바둑리그’에 참가 중인 한 기사는 “프로 입단이 목표인 연구생이나 기존 프로 기사들도 이젠 도장보단 AI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서 “동료 프로 기사들 중에선 현역에서 물러난 후 ‘인생 2막’을 걱정하는 친구들도 많은 게 사실이다”고 토로했다.
AI 주도의 급박한 반상 패러다임 재편…바둑계 내부에서조차 독창성 결여 우려도

지난 2022년 6월 강원도에서 개최된 국내 첫 ‘세계인공지능(AI)바둑대회’에서 예선전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과 중국, 일본, 호주, 프랑스 등에서 19개 팀이 참가한 이 대회 우승컵은 중국의 ‘일레고’에 돌아갔다. 한국기원 제공
바둑계 내부에선 지나치게 높아진 AI 의존도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바둑 입문부터 기본 정석 연구, 프로 입단과 실전 대국 검토가 철저하게 AI에 의해 진행되면서다. 치밀한 전략과 판단력을 기반으로 설계, 한때는 인간 고유의 미적인 예술로도 인정됐던 4,000년 역사의 바둑 패러다임이 AI에 따라 인위적으로 재편된 흐름 탓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반상에서의 창의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팽배하다. 바둑TV의 한 해설 위원은 “요즘엔 연습 대국이나 실전에서 패한 경기를 복기할 때 치열하게 연구하고 고민해서 최선의 수를 찾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AI 프로그램에 의존하면서 편한 과정만 거치려고 한다”고 꼬집었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다’는 관점에서 이미 스포츠로 분류된 바둑의 위상이나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바둑계 일부의 부정적 진단과 일맥상통했다. 또 다른 바둑TV 해설 위원도 “AI에만 의존하는 분위기에선 바둑 고유의 독창성이나 창의성을 기대할 순 없을 것”이라며 “중·장기적인 측면에서도 바둑의 인기가 하락하면서 대중화에도 결코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짚었다. AI에 기대면 기댈수록 일반 대중들의 관심이 더 멀어질 수 있단 얘기였다.

이세돌(42·은퇴, 왼쪽) 9단이 2016년 3월 15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호텔에서 구글 바둑 인공지능(AI) 프로그램 ‘알파고’와 마지막 대국을 마치고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최고경영자(CEO)와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그래서였을까. 9년 전 당시 인간계 최고수였던 이세돌(42·은퇴) 9단과 100만 달러(약 12억 원) 상금을 놓고 벌인 5번기(5판 3선승제) 맞대결에서 당초 예상과 달리 4승 1패로 완승하면서 ‘신드롬’까지 불러일으켰던 구글 AI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 등장 이후, 폭발적이었던 바둑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진 것도 작금의 현실이다. 한국기원에 따르면 이 9단과 알파고가 벌였던 5번 대국 가운데 3국에서 1.76%까지 올랐던 바둑TV 시청률은 지난해 평균 0.08%에 불과했다. 바둑계 관계자는 “알파고와 이 9단의 맞대결로 절정에 올랐던 시점의 바둑TV 시청률을 이벤트가 없었던 평범한 시점과 단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면서도 “중요한 건 바둑 인기가 하향세로 접어든 추세이다”라고 분석했다.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알파고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이 9단 또한 이런 쓴소리와 유사한 의견을 피력했다. 이 9단은 지난해 11월 서울대 강연에서 “바둑을 보드게임이 아닌 예술로 배웠다”라며 “(요즘엔) 기사들이 처음 50수까진 AI를 보고 따라 한다. 정답이 없어야 예술인데, 이건 보드게임이 맞다”라면서 알파고 이후 급변한 바둑계 현주소를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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