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합] "싸워야만 했다"… 입단 40년 '철녀' 中 루이 9단의 계산된 반상 '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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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3년 만인 1988년 세계 최초 여류 9단
무지막지한 전투 행마에 '철녀'란 별명 얻어
1980~2010년 초반, 세계 여자 바둑계 독식
혼성기전서 이창호-조훈현 꺾고 우승 새 역사
‘스포츠에서 여성이 남성에겐 힘들다’ 통념 파괴
인공지능(AI) 긍정적으로 활용해야…예찬론
신진서는 이창호와 이세돌 장점만 갖춰…극찬
“올해 다음 대국 준비할 것”…내구성 강화 집념

“싸워야만 했습니다.”
다소 어눌한 한국어 말투 속에선 간절함이 확연했다. 자신의 생존 문제와 직결됐기에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고 했다. 타고난 성격과는 동떨어진 살벌한 반상(盤上) 전투 행마 고수 탓에 ‘철녀’로 살아야만 했던 남모를 속내였다. 4,000년 바둑 역사에서 세계 최고 여류 기사로 평가된 중국 루이나이웨이(62) 9단에게 본인의 유별난 기풍에 대해 묻자, 돌아온 솔직한 답변이 그랬다. “(대국에서) 상대방에게 무조건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만들어진 것 같다”라고 덧붙이면서다.
올해로 입단 40년인 그의 이런 승부사적인 기질은 지난 4일 국내 시니어 대회 참가 방한 일정 도중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진행한 인터뷰 초반부터 감지됐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란 스포츠 속설을 실전에서 응용했단 의미로 들렸다. 반상에선 상대방의 돌을 끊고 가두고 마침내 숨통까지 조여간 폭력적인 바둑으로 유명했지만 정작 루이 9단은 본인에 대해 “평소엔 서예와 그림을 즐기면서 여가를 보내고 있다”라며 “자신의 기풍은 실제 성격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라고 소개했다.
남녀 혼성기전서 세계 최초 우승… ’스포츠에선 여성이 남성에겐 힘들다’ 통념 파괴
루이 9단은 세계 여자 바둑계의 거목이다. ‘스포츠에서 여성이 남성에겐 힘들다’란 통념을 파괴한 주인공이 루이 9단이다. 입단(1985년) 이후 3년 만에 여성으로선 세계 최초로 9단까지 승단한 그는 1992년 세계 메이저 기전인 ‘제2회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대회’에서 준결승에 안착했던 것. 남녀 통합 세계 기전의 첫 여류 기사 4강 진출로 새겨진 이 기록은 2022년 한국 최정(29) 9단의 ‘삼성화재배 월드바둑마스터스대회’ 준우승 직전까지 회자됐다.
새 역사는 2000년 열렸던 ‘제43기 국수전’에서 쓰였다. 루이 9단이 세계 바둑계 쌍두마차였던 이창호(50) 9단에 이어 조훈현(72) 9단마저 꺾고 우승한 것. 혼성기전 타이틀매치에서 여성이 남성에게 승리한 이 대기록은 현재까지 유일무이하다. ‘제43기 국수전’ 결승에서 패한 조 9단은 “루이 9단의 힘이 엄청 좋다”라며 “전투력이 장난이 아니다”라고 혀를 내둘렀다. 루이 9단은 3번기(3판2선승제)로 벌어졌던 이 기전에서 조 9단에게 1국을 내줬지만 2국에 이어 3국까지 연거푸 승리, 역전승으로 우승컵도 차지했다. 당시 소식을 접한 영부인이었던 고 이희호 여사는 루이 9단에게 “여성으로서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이뤄낸 쾌거에 진심으로 축하드린다”란 내용의 축전도 전했다.
루이 9단 역시 25년 전 추억은 소중하다고 했다. “이 9단이나 조 9단과 대국 자체가 행복했어요. (제 실력으로) 우승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겸손한 답변이었지만 루이 9단의 실제 반상 성적표는 화려했다. 1980~2010년대 초반까지 30년 동안 세계 여자 바둑계를 점령한 루이 9단은 최전성기였던 한국기원 객원기사(1999~2012년) 활동 시절에만 국내·외에서 29개의 우승컵을 독식했다.
사상 초유 커제 9단 ‘LG배 기왕전’ 판정 불복 사태... “너무 아쉽다” 눈시울 붉혀
그래서였을까. 중국 바둑계에서도 ‘친한파’로 알려진 루이 9단의 한국 사랑은 각별했다. “김치찌개나 된장찌개, 불고기 요리 정도는 가능합니다. 월드컵이 열렸던 2002년엔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종로에서 길거리 응원도 했어요.” 23년 전 기억까지 또렷하게 떠올린 그의 얼굴엔 그날의 흥분이 재소환이라도 된 듯, 엷은 미소도 번졌다.
하지만 연초부터 한중 바둑계를 달궜던 커제(28) 9단발(發) 역대급 대참사 질문에선 그의 표정은 금세 달라졌다. “커제 9단과 동일한 상황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딱히 평가할 순 없습니다만 바둑팬들이 지켜본 가운데 그런 불미스러운 사태가 발생해서 아쉬울 뿐입니다.” 눈시울까지 붉히면서 떨려온 그의 목소리에선 안타까움이 전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1월 한국 변상일 9단과 세계 메이저 기전인 ‘제29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결승전에 나섰던 커제 9단은 사석(상대방의 따낸 돌) 관리 규정 위반에 따른 반칙패로 우승컵을 헌납하자, 사상 초유의 판정 불복 선언과 더불어 시상식까지 불참하면서 한중 바둑계도 냉각됐다. 이후 한국기원 측의 해당 규정 수정 발표로 수습 국면에 들어섰지만 양국 바둑계는 아직도 개운치 못한 상태다. 중국 바둑계에선 2개월 전에 마무리된 커제 9단의 이번 ‘제29회 LG배’ 준우승을 지금까지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된 루이 9단의 해법은 명확했다. “계가 방식을 포함해 각국에서 현재 서로 다른 형태로 적용 중인 대국 룰(규정)에도 통일된 표준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젠 어렵더라도 머리를 맞대고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해요.” ‘제2의 커제 파동’을 막기 위해서라도 바둑 경기 진행과 관련된 국제 기준 마련은 더 이상 미룰 순 없단 얘기였다.
인공지능(AI) 긍정적으로 활용해야…”신진서는 이창호와 이세돌을 합친 듯” 극찬
바둑계 화두인 인공지능(AI)에 대해선 예찬론으로 일관했다. “예전엔 선배들한테 질문이 있어도 눈치를 먼저 봤어요. 시간 낭비에, 효율성도 떨어졌어요. 근데 AI 앞에선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얼마든지 마음 편하게 바둑을 연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어려운 국면에서 정답도 금방 찾을 수 있게 된 부분도 긍정적입니다.” 루이 9단은 글로벌 바둑계에 들이닥친 AI발 판도변화 조짐 또한 나쁠 게 없다고 했다. “한국과 중국 중심이었던 세계 바둑계가 최근 AI와 함께 급성장한 일본이나 대만 덕분에 더 건강해진 느낌입니다.” 보다 다채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면서 바둑팬들의 관심 또한 가져올 수 있게 됐단 취지였다.
주목할 만한 후배에 대한 물음에선 주저 없이 세계 랭킹 1위인 신진서(25) 9단을 지목, 극찬까지 쏟아냈다. “바둑에선 유·불리한 형세에 따라 전략도 달라야 합니다. 이창호 9단에겐 일단 유리해진 국면을 끝까지 끌고 가는 힘이 있어요. 이세돌 9단에겐 불리해진 장면을 한 번에 뒤집는 감각이 있었습니다. 신 9단은 이창호 9단과 이세돌 9단의 이런 장점들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환갑을 넘겼지만 인터뷰 말미에 귀띔한 그의 바둑 열정은 상당했다. 최근 국제 시니어 대회에서 녹슬지 않은 기량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쉬어갈 법도 했지만 루이 9단의 생각은 달랐다. 지난달 한중일 3개국에서 각각 베테랑 4명씩 참가, 연승 대항전으로 열렸던 ‘제2회 농심 백산수배 세계바둑시니어최강전’에 출전해 깜짝 5연승과 더불어 자국 우승까지 견인했음에도 루이 9단의 내구성 강화 집념은 여전해서다. “아버지를 따라서 초등학생 때부터 바둑을 접한 이후,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중국에 돌아가면 다시 기원에 나가야죠. 올해 남겨진 대국을 준비해야 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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